Review

번호 제목

강정순 - J S Violin [3]

2년 전 현악기 제작가 강정순과 약속을 했다. 그 때 당시 제작가 강정순은 처가와 가까운 곳에 귀농을 하려한다 했다. 땅을 일구고, 집을 짓고 그곳에 공방을 차릴 즈음 인연이 되면 만나자고…     -집에 시계가 없다. 날씨나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하루를 계산하겠다. 혹, 전화가 오지 않는 이상 몇 시인지도 알 길이 없다.“전화도 잘 안 터진다. 지금 앉아계신 그 자리만 전화가 터진다. 워낙 시골에 산골짜기라…”     -정말 외진 곳이다. 땅을 일구고 집을 지으셨다. 물론 직접 지으신 것은 아니지만 보통 일이 아니다. “길도 연결이 안된 아예 없는 장소를 사람 사는 곳으로 바꾸었다. 길도 없었고 이곳이 습지처럼 버려진 곳이었다.”     -귀농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솔직히 지금의 형태로 봐서는 귀농을 위한 공간은 아닌 것 같다. 조용한 삶을 위한 전원주택이다. 정말 산골짜기로 깊이 들어오셨다. 지방

이문태 - 이문태

서울에서 멀다고 하면 먼 익산에서 현악기 제작자 이문태를 만났다.   -주변 제작자분들에게 손이 굉장히 빠르다는 소리를 들었다. “잘 만들던 못 만들던 시작을 했으면 줄을 걸어서 들어봐야 한다. 만드는 과정에서 여기가 틀렸고 저기가 못 생겨지고 했다해서 방치하고 그러다보면 계속 만들다만 악기들만 늘어난다. 어떻게 되든 다작을 해보고, 거기에서 실수를 해야 다음부터 그 실수를 넘어갈 수 있거나 실수 이전 과정에서 그 실수를 인지하고 더욱 신경써서 좋은 악기가 나올 수 있다. 하물며 실수가 있다해도 넘어가고 다음 단계로 진행을 꼭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실수과 실력이 쌓이면 그것이 솜씨라고 생각한다.”   -손이 빠르다라는 것에서 제작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는가“나의 경우, 바이올린, 비올라를 기준으로 했을 때 가장 무난한 것이 두 대를 동시에 물려서 진행하는 것이다. 세 대 정도는 무리가 있더라. 천천히 하나씩 몰아가는 스타일도 있지만 내 성격이

윤진섭 - 윤진섭 [2]

윤진섭의 비올라 한 대를 연주자에게 소리를 틔워달라고 요청한 이후 해당 비올라의 사운드에 대한 이야기와 사운드 셋팅 작업을 하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연주자가 그 자리에서 연주 후 사운드가 너무 맥시멈으로 잡혀 있다고 느꼈단다. 의도적으로 사운드를 강하게 잡은 것인지, 운반상에서 트러블이 생긴 것인가 궁금해 했다. 그래서 현 상태에서 소리를 틔우는 것 보다 한 번 더 확인하자는 의미로 다시 가져왔다. “이 비올라는 미국 콩쿨에 참가 했던 악기다. 콩쿨의 장소로 쓰이던 홀이 전체가 카페트가 깔려서 소리를 다 먹어버린다. 그래서 소리를 최대한 맥시멈으로 잡아서 셋팅 했다.”     -아, 그리고 이 비올라는 사진을 찍었는데.. 나무결을 살려서 깎으셨는데 그 결이 빛 반사로 인해 에프홀 부근의 아칭에 결이 드러난 채로 찍혔다. 몇 번을 찍어도 방법을 못 찾아서 그냥 진행했다. 그리고 카메라의 브랜드 특성인지 약간은 붉게 나왔다.“문제없다. 그리

신동진 - 비아체노 공방 [1]

-굉장히 어린 나이에 이태리로 간 것으로 알고 있다.“18살 때다.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97년, 고등학교를 졸업 하기 전에 3학년 2학기 즘에 이미 준비를 다 하고 있었다.”   -인터뷰에서 효정악기(효정악기의 대표가 신동진의 아버지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되는가. 악기에 관련 된 일을 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었나 싶다.“뭐, 효정악기에 대해서는 어차피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악기 제작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권유가 제일 컸고, 선배 제작자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사실 더 큰 이유도 있는데…차마 인터뷰로는 조금 그렇다.(웃음)”     -18살에 가서 지금 32살 (2010) 이면 악기 세계에 발을 들인지 꽤 오래 됐다. “악기 세계라고 하면 그 시작점이 없다. 어릴 때부터 봐온 것이 악기고, 예를 들어 방학 때 용돈이 필요하면 아버지에게 가서 아르바이트로 악기제작 일을 도왔다.   -악기 제작이라는 일

김민성 - Liutaio [1]

2006. 10  Won bronze medal for cello in 11th Triennale competition of cremona.2006. 11  Won \"Certificate of merit\" for cello tone in 17th international competition of  VSA (Baltimore, Maryland)2007. 5  Was 4th place for cello tone in international competition of cello making in Manchester.2008. 8  Won Gold medal(cello) of 2nd Pisogne italian national violin making competition in progressional division.2009. 8  Won silver medal(cello) of 3rd Pisogne italian na

장용 - 라무자 아카데미 [1]

대패질 소리가 끊이지 않는 라무자 아카데미에서 현악기 제작자 장용을 만났다.     -배우고 있는 학생들이 많다. 취미로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유학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현재 배우고 있는 학생들 중 유학 준비생들이 반 이상이다.”     -그렇다면, 제작에 대한 스승의 입장도 있지만 유학을 보내는 선배의 입장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겠다. 어떤가? 걱정이 많이 되시겠다. 손재주도 그렇고 성격적인 면도 그렇고, 또한 그곳에 도착해서 생활을 잘 하는 것 까지 신경을 쓰셔야 하니… “내가 하는 일은 악기를 잘 만든다 못 만든다 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학생의 성격에 맞게 맞춰가면서 악기를 만들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나도 악기 제작을 시도 해보고 싶었는데, 워낙 성격이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하는 성격이라 그 동안 제작자분들을 만나보고 느낀 것이 내 성격과는 조금

정성훈 - 정성훈 스트링 [1]

-그 동안 만남이 너무 잦아서 인터뷰 내용이 많이 줄 것 같다.(웃음) 밖에 첼로가 한대 있다. 참 괜찮은 녀석으로 보인다. “아… 빨리 끝내야 하는데, 매번 밀리고 있다. 실험성을 가지고 만들었다. 앞판을 열어보면 내부가 산처럼 구불구불하다. 이 첼로는 이태리 시절 친구집에서 만들었다. 지하여서 습기도 많고 춥고...정말 어렵게 어렵게 만들었다. 첼로는 참… 많이 만들고 싶어도 재료값이 너무 많이 들어가니, 한 대 팔려야 다음 것을 만들 수 있다.”     -몇 년에 이태리로 넘어갔는가? \"98년, 21살 때이다.\"     -가장 어렸을 것 같다. \"뭐, 고등학교 졸업 하자마자 온 사람도 있었다.\"     -그럼 그 때면 동기 분들이다 형 누나, 삼촌뻘이었겠다. “어릴 때 가기는 갔는데, 너무 철 없던 시절이라 그 때는 사실 어떻게 살겠다 라는 개념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조금은

김남현 - Maestro [1]

gentile. agilmente. 연신 하품을 하는 제작자 김남현과의 인터뷰에서 느낀 점이다.     -어제는 밤 세워서 무엇을 하셨나.“아, 뭐, 술 좀 마시고(웃음), 늦게까지 일하고 후배 제작자와 술을 마셨다. 후배의 공방 차리는 것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제작 쪽 일을 한지 오래 되셨다.“처음에 이곳 서초동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목동에 있는 악기사에서 나름의 연마를 했다. 제작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수리 등의 실무를 바로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목동악기사의 현악기 전문 파트의 수리 제작으로 4년 정도 일했다.”     -그때가 언제인가.“1999년… 그 정도. 수학을 하고 한국에 들어온 것이 아마도 1998년이다. 뭐, 나름 이태리에서 돈도 잘 벌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아시는 분이 자꾸 한국에 들어 올 것을 원하셔서 부산에서 같이 일을 했는데, 뭔가 포인트가 잘

정재경 -K&J 바이올린 스튜디오 [1]

여성 현악기 제작자가 있다. 한국에 악기를 만드는 제작자가 있냐는 질문을 많이 받고 다녔는데 여성 제작자가 있다. 정재경은 23살의 나이에 현악기 제작을 위해 이태리로 갔다. 20대 시절을 고스란히 그곳에서 악기 제작과 함께 했다. 이하 인터뷰 전문.     -제작자 권석철과 부부라는 것을 밝혀도 되나. “된다. (웃음) 우리는 이태리에서 만나 결혼했다. 어짜피 주소도 같고 공방 이름도 같아서 굳이 안 밝히려고 해도 아실 것이다.   -크레모나에서의 체류기간은. “8년 정도이다. 2000년에 가서 2008년에 돌아왔다.”     -크레모나 이전에는 무엇을 했나. “대학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음악 공부도 재밌었지만 졸업후에 진로가 걱정도 됐었다. 처음에는 대학 졸업후 치료음악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우연히 본 음악잡지에 소개된 현악기 제작가라는 직업이 날 흥분하게 했다. 그래서 돈을 좀 벌고 유학을 가려고 다니던 대

권석철 -K&J 바이올린 스튜디오 [1]

딱 십년 전 권석철은 현악기 제작의 길을 가기위해 이태리 크레모나로 떠났다. 작년에서야 한국으로 들어온 그는 홍성에서 그의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이하 인터뷰 전문.          -한국에 오신지 대략 1년이 되었다. 요즘 들어 현악기 제작학교에서 돌아 오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크레모나의 경우 지금 40 ~ 50명 정도 있다. 그 중에 아주 소수가 외국으로 진출하고 대부분은 한국으로 돌아온다. 앞으로 한국은 제작자들간의 경쟁이 치열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3 ~ 4년 동안 입학생들이 줄고 있다.\"   -한국에서 돌아와서 바로 이곳(홍성)에서 자리를 잡으셨다. 왜 서울 서초동이 아니었나? “서울이 싫었다. 그냥 크레모나 같은 시골이 좋았다. 친지 분의 도움으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조금 적막하다. 악기에 대하 공유할 사람이 적어서 지금은 적응이 되긴 했지만 처음엔 많이 적막했다.” &nb

박경호 -경호park 현악연구소 [1]

현악기 제작자 박경호. 그는 이태리 굽비오 제작학교의 한국인 1호다. 1999년 이태리로 건너가 악기제작을 배운 그는 2003년 한국으로 돌아와 경호 park 현악연구소를 운영, 지금은 고향인 부안에 스스로 집을 짓고 그곳에서 공방을 계속 운영 중에 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   역주: 인터뷰 중간 중간 박경호님의 아드님의 난입(?)으로 녹음기 대화 내용 이외에 알 수 없는 비명소리와 몬스터를 시전하는 소리 등이 들려 인터뷰 전문을 적을 수 없었다. 그나마 아이스크림 2개라는 딜이 성공하여 녹음 내용의 부분이라도 건진 것을 아드님께 감사한다.     -혼자서 집을 지으셨다. 대단하다. \"서울의 공방을 철수하고 이곳(부안)으로 내려와서 처음 한 일이다. 관련 서적을 많이 읽고 흙과 나무로만 집을 만들었다. 쉬고 싶은 마음으로 집을 만들었는데 집 만드는 내내 악기 만드는 생각만 했다. 손이 근질근질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스트링 겔러리 에프홀 소개글입니다. [1]

이 공간은 현악기 제작자의 인터뷰 내용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각 제작자님들을 찾아 뵐 에프홀의 기자이면서 대표로 있는 이정원입니다. 미리 인사 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반갑다. 에프홀이다. 인터뷰 응해줘서 고맙다. “뭐가 반갑나. 자문자답의 형식의 인터뷰다. 반갑다라니, 사람들이 다중인격으로 오해하겠다.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에프홀을 소개하고 싶어서 생각해낸 궁여지책이다. 아마도 이런 형식의 회사소개글은 없을 것이다.”     -에프홀을 간략하게 소개해달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에프홀은 한국의 현악기 제작자들과 그들의 악기를 소개하는 사이트다. 하나씩 하나씩 손으로 만들어나가는 현악기들을 소개하고 그 악기를 만든 사람들의 생각과 철학을 담아 가고 있다. 또한, 일부 악기들을 시연 가능토록 에프홀 사무실에 위탁 전시 중에 있다.”     -에프홀을 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