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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재경 -K&J 바이올린 스튜디오 조회수 15542
작성자 fhole*** 작성일 2009-10-09 13: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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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현악기 제작자가 있다. 한국에 악기를 만드는 제작자가 있냐는 질문을 많이 받고 다녔는데 여성 제작자가 있다. 정재경은 23살의 나이에 현악기 제작을 위해 이태리로 갔다. 20대 시절을 고스란히 그곳에서 악기 제작과 함께 했다. 이하 인터뷰 전문.

 

 

-제작자 권석철과 부부라는 것을 밝혀도 되나.

“된다. (웃음) 우리는 이태리에서 만나 결혼했다. 어짜피 주소도 같고 공방 이름도 같아서 굳이 안 밝히려고 해도 아실 것이다.

 

-크레모나에서의 체류기간은.

“8년 정도이다. 2000년에 가서 2008년에 돌아왔다.”

 

 

-크레모나 이전에는 무엇을 했나.

“대학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음악 공부도 재밌었지만 졸업후에 진로가 걱정도 됐었다. 처음에는 대학 졸업후 치료음악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우연히 본 음악잡지에 소개된 현악기 제작가라는 직업이 날 흥분하게 했다. 그래서 돈을 좀 벌고 유학을 가려고 다니던 대학에 덜컥 휴학서를 냈고 언어를 배우면서 아이들에게 피아노 가르치는 일을 좀 하고난후 무작정 이태리로 갔다.”

 

-그 때 나이가.

“23살이었다.”

 

 

-크레모나 학교에 대해서 말해달라.

“만약 현악기 제작을 위해 이태리를 선택했다면 개인적으로는 크레모나 학교를 추천하고 싶다. 물론 많은 과목을 이수해야 하고, 학년을 통과하지 못할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과목들을 통해 새로운 경험도 할수 있다. 이태이어나 이태리 역사같은것을 배울때는 이태리 문화를 이해하는데도 크게 도움을 얻을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크레모나 수업에는 체육, 이태리 역사, 영어, 종교수업 등 다양한 수업들이 있다. 그만큼 크레모나 제작학교는 언어를 잘하는것이 중요하다. 5년 과정이 길지만 본인의 능력에 따라 중간 학년으로 편입도 가능하고 상위 학년으로의 월반도 가능하다.”

 

 

-솔직히 말해서 여자들이 하기에는 힘든 직업이다. 그곳에서는 어떠했나?

“여자들에게만 힘든 직업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처음에는 힘든 일이었고 지금은 내게 꿈을 갖게해준 고마운 일이다. 악기를 만드는 시간이 정말 행복하다. 사실 처음에는 우아하게 스크롤 깎는 작업같은것을 상상하며 갔었는데 막상 가니 기계에 칼을 가는것 부터 배워야 했다.  처음 기계를 접했을때는 겁이 덜컥 났었다. 처음 첼로를 만들때는 힘들어서 고생도 많이 한것 같다.

 

하지만 여자들이 하기 힘든 일이라는것은 편견인것 같다. 일을 해 나가면서 점점 기술이나 요령이 는다. 처음부터 잘하는 여자분들도 많다. 나같은 경우에는 처음에는 좀 고생을 했었고, 다른 공부를 해볼까 고민도 했었던거 같다. 하지만 한 3년이 지나니 적응이 되고 일이 손에 붙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물리적으로 일이 힘들다기 보다는 좀더 나은 악기를 만들려는 고민이 더 힘든것 같다. 아직도 매번 새로운것을 깨닫고 매번 슬럼프를 겪는다."

 

-국내에 여성으로서 제작하는 분들이 있나?

“수리, 복원으로는 없지 않게 존재한다. 제작하시는 분들도 계시다. 실력있는 분들도 많다.” 

 

 

-국내 제작자들의 현악기도 보기 힘들지만 국내 제작자이면서 여자가 만든 악기라고 하면 분명 네거티브를 내포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만약 내 악기에 대한 설명을 할 장소가 마련된다면 혹은 이 자리에서 내 악기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하고 싶나.

“그런 편견은 이태리에서도 있었던것 같다. 하지만 반에서 우수한 학생이 여학생인 경우가 더 많았다. 악기의 특성은 성별과는 상관 없으며 각자 개개인의 개성이나 연구가 악기의 결과에 더 많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작업시간이 남자에 비해 더 걸리지 않을까.

“나같은 경우에는 처음에 시작할때는 같은반 다른 남자들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렸었다. 하지만 좀 시간이 지나자 별 차이는 없었다. 오히려 내 작업 속도는 빠른 편이었다. 작업의 속도는 누구나 점점 빨라진다. 작업의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단순하게 악기를 만드는것이 다가 아니라는걸 깨닫는 순간 악기 제작 기간은 길어진다. 악기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제작자가 다른 제작자를 평가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권석철과는 부부 사이기 때문에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 같다. 권석철의 악기와 자신의 악기를 비교한다면.

“나는 많은 마에스트로 밑에서 일을 했었다. 그에 반해 권선생은 몇몇 마에스트로 밑에서 꾸준하게 배운 편이다. 그리고 우린 성격적인 면에서 많이 다르다. 그런 면에서 스타일과 소리에 많은 차이가 있다. 그의 악기는 무겁고 진중한 소리를 내고 스타일 면에서도 그런면이 많이 배어나온다. 반면 내 악기는 소리가 밝고 경쾌하고 스타일도 여성스러운 편이다. 그의 악기는 베토벤 같고 내 악기는 모짜르트 같다.”

 

 

-지금 제작 중인 비올라를 기준으로 설명을 해준다면.

“사실 이 악기는 내가 비올라 연습이 하고 싶어서 만든 악기다. 그래서 이 악기에 애정이 크다. 악기를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나보다 더 연주를 잘하는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악기 제작가가 자기의 악기를 갖는것은 정말 쉬운일이 아니다. (웃음) 그렇게 넘긴 악기가 벌써 세번째다. 이번 악기는 모델 자체가 내 생각이 많이 들어간 것이다. 기본은 스트라디 바리 모델을 사용하고, 악기의 사이즈를 좀 크게 만들어 보았다.  악기의 생김새도 스트라디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결과는 내가 원하던 것에 많이 접근한것 같다. 하지만 악기가 좀 커서 내가 쓰기에는 좀 버겁다. 내 원래 팔 길이는 39센치 인데 이 악기는 41센치다. 그래서 다시 새 주인을 찾는 중이다.  크레모나에서 백통을 완성하고 이 곳에서 마감 작업 중이다. 백통 상태에서 일 년 정도 건조 후 칠 작업 중이다. 백통상태에서 안정을 찾은후 칠을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다. 이 비올라가 크레모나의 마지막 작업이다.” 

 

 

-권석철과 공방을 같이 쓰지만 테이블부터 각재, 도구 모두 분리해서 쓴다고 들었다. 바니시도 그런가.

“바니시는 같이 만들어서 쓴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실험해서 좋은 바니시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베이스부터 마지막 공정까지의 칠 방식은 다르다.” 

 

 

-외람된 질문이지만 만약에 제작자인 권석철과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현악기 제작을 계속 하고 있었을까.

“제작은 계속 했겠지만 밥을 먹기위해 수리를 했을것 같다. 악기 수리도 정말 매력적인 작업이다. 하지만 아직 악기 제작에 배울것이 많아 수리를 했다면 아쉬움이 많이 남았을 것이다. 솔직히 제작만 하면서 사는건 경제적으로 좀 힘이 든다. 하지만 좀 굶더라도 우리가 하고싶던 제작을 계속 하기로 했다.

 

만일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직 이태리에서 있었을것 같다. 어쩌면 멋진 이태리 남자와 연애를 할지도 모르겠다. (웃음)”

 

 

-현악기 제작자가 모든 악기를 다 하는 것이지만 비올라에 대한 애착이 좀더 강해서 비올라에 애정과 시간을 더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는가.

“비올라는 참 매력적인 악기다. 다른 악기들의 목소리에 묻혀 있는듯 하지만 나름의 자기 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비올라를 좋아한다. 좋은 자기 소리를 가진 비올라를 잘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 아직은 이것저것 공부하고 악기에 적용해보고 있는 중이다. 나만 만들수 있는 개성있는 비올라를 만들어 보고 싶다. 그렇다고 바이올린이나 첼로에 욕심이 없는것은 아니다. 어떤 악기든 아름답고 개성있는 악기들을 많이 만들어 보고 싶다.

 

-친척의 따님이 현악기 제작을 위해 이태리로 유학을 가겠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여자든 남자든 만일 열정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도전해 보라 말하고 싶다. 이 일은 열정 없이는 너무 힘든 일이다. 그리고 외모와 흉터 걱정을 많이 하시는 여자 분들은 피하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지금은 잘 다치지는 않지만 일하는 초반에 칼을 익히는 연습을 하면서 많이 다친다. 아직도 조금만 방심하면 큰 사고가 날수 있어서 늘 조심하는 편이다. 요령과 노하우 적응에 한 3년은 지나야 하는 것 같다.”

 

 

-지금 완성이 되어 가는 비올라의 주인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악기를 구매하는 연주자와 많은 대화를 하고 싶다. 연주자가 제작자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의견을 많이 얘기해 주었으면 좋겠다. 연주가와의 대화는 가끔은 행복하기도 하고 따끔한 지적에 가슴도 아프고하지만 많은 공부가 된다. 연주가의 지적은 제작가의 좋은 거름이 되는것 같다. 악기를 데려가는 연주가에게 일단은 많은것을 배우고 싶다.

 

그리고 좋은 연주로 악기를 행복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현악기 제작자 정재경의 손

 

제작자 정재경의 악기 보러가기

 

  • f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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