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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남현 - Maestro 조회수 18937
작성자 fhole*** 작성일 2010-05-07 12:2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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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tile. agilmente. 연신 하품을 하는 제작자 김남현과의 인터뷰에서 느낀 점이다.

 

 

-어제는 밤 세워서 무엇을 하셨나.
“아, 뭐, 술 좀 마시고(웃음), 늦게까지 일하고 후배 제작자와 술을 마셨다. 후배의 공방 차리는 것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제작 쪽 일을 한지 오래 되셨다.
“처음에 이곳 서초동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목동에 있는 악기사에서 나름의 연마를 했다. 제작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수리 등의 실무를 바로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목동악기사의 현악기 전문 파트의 수리 제작으로 4년 정도 일했다.”

 

 

-그때가 언제인가.
“1999년… 그 정도. 수학을 하고 한국에 들어온 것이 아마도 1998년이다. 뭐, 나름 이태리에서 돈도 잘 벌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아시는 분이 자꾸 한국에 들어 올 것을 원하셔서 부산에서 같이 일을 했는데, 뭔가 포인트가 잘 맞지 않아서 다시 이태리로 돌아갔다. 다시 이태리로 돌아가서 만든 것들이 진열장에 있는 악기들이다.(웃음).”

 

 

-정리하자면 98년에 한국에 들어오셨다가 일 년, 그리곤 다시 이태리에서 일 년 정도 체류하고 다시 한국에 들어와서 목동의 악기사에서 4년… 98년에 이태리 크레모나 제작학교를 졸업 하신 것이라면 그 이후 다시 돌아갔을 때는 개인적인 활동을 하신 것인가.
“개인적인 활동이 라기보다 뭐, 약간 벌어 놓은 돈을 홀라당 쓰고 들어온 것이다. 고악기에 대한 공부를 하고 왔다. 고악기는 크레모나에서도 대가 끊겼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씩 얻은 노하우로 완성을 했다. 이런 방법이 아니라면 크레모나 외각지역에 고악기 제작자가 계시기는 하지만 마에스토로 밑에 들어가면 완성에 대한 기약이 없다고 판단하여 현대악기 제작에 대한 기본은 있었으니 좀더 현실적인 방법을 택해서 공부만 했다.”

 

 

-김남현이라는 개인의 이름으로 공방은 올해 오픈 했다.
“이태리에서 다시 돌아와서 4년 정도 목동에서 일하고 서초동의 ****악기사에서 4년 정도, 음. 개인공방을 열기 까지 10년이 걸렸다. 뭐 공부한 것 까지 치면 20년 정도? 공부하러 이태리에 간 것이 아마도 94년에 갔나…응, 94년에 가서 98년에 크레모나를 졸업했으니까…쩝, 거의 20년이 걸렸다. 사람들이 너무 느리다라고 말하는데…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뭐, 일찍 독립하건 늦게 독립하건 별 차이가 없다.” 

-상명대 바이올린 제작 전시회에서 만드신 고악기들을 처음 봤다. 고악기 등등이 거의 10대가 넘는다.제작 연도가 언제이며, 현대 악기는 어디에 있나.
“고악기들은 다시 크레모나 돌아가서 부터 계속 만들었다. 특히 목동에서 일할 때 밤을 세워서 만들었다. 뭐, 3 대 정도 한국에서 마무리한 것 같다. 현대 악기는 돌아와서는 한 대 만들었고 어느 연주자가 잘 쓰고 있다.” 

 

 

-5살 따님이 그린 그림과 재미삼아 만들었다는 스피커 케이스.

 

 

-몰라서 하는 질문인데, 바로크 바이올린은 음역이나 개방현이 현대 바이올린과 다른가.
“아니다. 개방현도 똑같다. 헤르츠가 낮다. 아마도 438정도? 그 정도면 지금과 비교하면 플랫정도 차이? 아무튼 440 헤르츠 이하일 것이다. 헤르츠가 올라간 이유는, 옛날에…아..이런 이야기들은 강의 때 하는 이야긴데…. 현악기라는게 옛날 궁중에서 귀족들 밥 먹을 때 ‘식사들 맛나게 하세요’ 의미의 깔아주는 반주 혹은 춤 출 때의 음악 정도가 출발이다. 그 이후로 대중화 되고 홀이라는 것이 생기고 뒷사람까지 듣기 위해서 헤르츠가 높아진 것이다.”

 

-고전은 잘 모른다. 바로크 바이올린이 헤르츠만 낮게 잡는다면 뭐, 현대 바이올린 주자가 바로크 바이올린을 구할 수 있다면 연주는 가능하겠다.
“연주야 당연히 가능하다. 바로크 전문주자가 되려면 현대 바이올린과 다른 활 쓰는 법, 기법 등 전문적인 것을 배워야 하지만 바로 연주는 가능하다.”

 

-비올라 다 감바는 어떤가. 첼로 주자가 연주가 가능할까. 딱 봐도 벌써 6현에 플랫들이 붙어 있어서…
“7현도 있다. 비올라 다 감바와 첼로는 완전히 틀리다. 뭐 그래도 비올라 다 감바에 접근하려는 연주자들은 대부분 첼로주자이다. 개념 자체는 완전히 틀리다.”


-비올라 다 감바는 기타 처럼 플랫들이 있다. 듣기로는 플랫이 이동 가능하다고 들었다.
“플랫으로 정확한 위치를 찾기도 하고 음역 자체를 바꿔서 곡에 맞게 세팅이 가능하다. 콘트라베이스처럼 음역을 변경하여 곡에 맞게 연주할 때도 쓰인다.

 

 

“감바가 첼로의 전신 혹은 바이올린 페밀리들의 전신이라고 생각하는가?”
-에…같은 것, 혹은 감바 등등이 바이올린족의 전신으로 감바 등등이 조금씩 발전해서 지금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로 발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니다. 그 시대부터 이미 공존해 있었다. 정확하게는 바이올린족, 감바족으로 나눠야 한다. 감바족이 먼저 출발해서 그것에서 바이올린족으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같이 공존하다가 감바족들은 유행에서 밀린 것이다. 소리가 길게 안 빠져나가고 작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외면을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말 그대로 유행에 밀려 물러난 악기들이다. 현대 바이올린들은 초석 혹은 기준이 되는 아마티, 과르넬리라든가, 스트라디 등이 있다. 그런 명기 혹은 제작자들이 하나의 기준이라면 고악기 쪽에도 그런 제작자 혹은 명기가 존재하는가.
“음… 못 들어본 것 같다. 아, 지금은 있다 현시대에 그런 제작자들이 있다. 뭐, 근데 그 시대의 명기도 분명히 이태리 어느 박물관에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감바족, 비올족의 전문가로 Brescia 학파의 Paolo Maggini, Gasparo Bertollotti등의 악기들이 밀라노와 피렌체 시립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악기 제작을 한 계기가 무엇인가.
“아, 군악대에 있었다. 파트는 트럼본이었고…고등학교 때도 밴드부, 딴따라를 했었다(웃음). 군악대에 있을 때 뭔가 깨작깨작 잘 했다. 그걸 본 고참이 손재주도 좋으니 한번 악기제작을 해봐라라고 말해서 그냥 준비도 없이 이태리로 떠났다.”


-그래도 유학인데 준비는 어떻게 했나.
“준비 그런 것 없었다. 진짜 무식하게 갔다. 텐트, 쌀, 버너 이런 것 들고 갔다. 물론 이태리어는 조금 준비했지만… 정말 무식하게 떠났다. 이태리에 악기 제작학교가 있다는 것만 알고 그냥 학교 주소들고 갔다. 처음엔 어학 공부를 위해서 피렌체로 갔었다.” 

 

 

-당시 크레모나, 94년에 한국사람들이 있었나
“많이 있었다. 박상현 선배님이 1호, 현재 크레모나에 있는 이형수선배님이 2호…3호가…음…장용 선배인가…”


-크레모나로 입성할 때를 말해달라.
“워낙 오래 전 일이라… 크레모나로 이동하는 첫날, 아는 사람도 없어서 가져간 텐트에서 지낸 날 밤이 생각난다. 아…그날 비가 아주 많이 왔었다. 논바닥에 텐트치고 잤다. 그 다음날 장용 선배의 도움으로 선배의 집에서 일주일 정도 기거했다.”


-(웃음) 장용 선생님은 다음 차례로 인터뷰 예약 중이시다.
“악기에 대한 열정과 그에 대한 스토리가 많은 분이시다. 꼭 뵙길 바란다.”

 

 

-크레모나 수학 시절 악기 제작이 나에게 맞다라는 생각이 들었었나.
“진짜 맞는 일이었다. 수학 시절에는 하도 일을 많이 해서 밤에 잘 때 손을 물에 담그고 잤다. 정말 손에 맞는 일이었다. 정말 열심히 했다. 내 몸에 정열이라는 정열은 모두 다 쏟아 부어서 지금은 정열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웃음). 내 자랑 같지만 난 손이 참 좋았다. 손으로 하는 일은 정말 잘 했다. 문제는 책상 공부가 힘들었다. 실기는 되는데, 페이퍼에서 문제가 정말 많아서 위태위태했었다. 매 학기 마다 한국으로 따지면 계절학기 마냥 늘 모자란 학점으로 겨우겨우 학년을 넘었다.”


-수학 시절 몇 대의 악기를 만드셨나.
“기억에 없지만 팔아먹은 것,학교에 기증한 것 뭐 기억이 가물한데…몇 십대는 제작한 것 같다.”

 

-자제분이 악기 제작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 이 질문의 요지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만족도를 물어보는 것이다.
“개인적인 만족도가 높은 일이다. 난 시키고 싶다. 가능하면 시키고 싶다. 거의 20년을 걸려서 나름의 전통과 신뢰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이어나가 내가 겪은 시행착오 등을 조금 더 단축 시킬 수 있는 자리를 내어 주고 싶다. 아이에게 꼭 물려주고 싶기 때문에 악기 판매라든지, 돈이라든지 내 이름에 누가 되는 행동은 할 수 없다. 어차피 느린 움직임이지만 더 길게 보고 있는 것이다.” 

 

 

-수학 시절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나. 생존율로 따지면?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면 적성의 문제인가.
“많다. 반타작이 안될 것이다. 학교의 과정 자체가 힘들어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입학은 많지만 졸업까지는 반 정도의 생존율이다.”


-농담인데, 졸업은 하셨나.
“(웃음) 했다. 근데, 졸업장은 거기에 두고 왔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알 것인데 생각하고 그냥 안 챙겨왔다. 아, 그리고 내가 아마도 마지막일 것이다. 내 이후로는 5년제로 학제가 바뀌었다. 그게 나름의 기준이 되어서 옛날 사람이다, 아니다로 구분 짓기도 한다(웃음).”

 

 

-강의는 어디로 나가시나.
“단국대, 계명대, 백석대 등등… 고악기에 대한 설명회 같은 특강 개념이다. 제일 처음 강의한 곳이 목원대인데, 아…정말 뭔 이야기를 했는지(웃음). 눈 앞에 학생들만 있으면 버벅거린다.”

 

 

-바로크 첼로,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 강효정님의 비올라 다 감바.

 

 

-크레모나 수학 시절,  실력으로 부러운 학우가 있었나.
“한 사람 있었다. 정일훈, 근데, 작고했다. 간암으로 한 3년 전이다. 전라도 광주에서 활동하고 개인 공방을 한 2년 했나… 그렇게 준비하고는 작고했다. 아, 그 당시 70년 개띠들이 세 명 있었는데 정일훈, 이형수… 나는 잘 모르겠는데 셋이 맨날 싸웠다고들 한다. 당구를 치던 운동을 하던 악기에 대해서도 항상 서로 안 지려고 했었다. 젊은 시절이라(웃음)… 이형수에 대해서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지만 직접 크레모나에서 들어보기 바란다.(웃음).”

 

 

-한국에 들어와서 현대 악기는 한 대 만들었다. 아쉽지 않는가.
“현대 악기는 아니지만 이상한 짓은 계속하고 있다(웃음). 찌그러진 바이올린이라든지, 변형을 둔 바이올린, 뭐 이런 것들… 현대 악기는 주문이 들어오면 할 생각이다.”

 

 

-김남현 악기 특징은.
“소리로 따지자면 단단한 컴팩트한 소리, 중심이 잡힌 잘 모아지는 소리를 좋아한다.”


-실제로 악기 수리라든지 셋팅을 할 때 그렇게 의도 하겠다.
“그렇다. 나를 찾아오는 대부분의 연주자들이 그런 소리를 좋아하는 것 같다. 반대의 셋팅의 경우 거의 시향분들이나 오케스트라분들이 섞이는 소리를 생각해서 그렇게 원하는 경우가 있다. 아, 그런 소리는 악기를 판매할 때 좋다(웃음). 악기를 구매하는 순간에는 다들 동글동글한 소리를 찾는 경향이 많더라.”

 

 

-사운드포스트와 브릿지, 현의 조절로 얼마나 더 좋은 소리를 끌어 올릴 수 있나.
“아주 아주 많이 향상 될 수 있다. 브릿지 하나 교체하는 것 보다 현을 다른 브랜드의 현 혹은 새 현으로 교체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개인적으로 요즘 현에 대한 관심이 많다. 첼로를 기준으로 궁합에 맞는 현을 찾아보고 있다. 현의 수명에 대해서도 궁금한데 라센은 두 달 에바는 이 주 정도 된다고 들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개인적인 생각인데, 아무래도 현의 심을 감고 있는 코어의 재질과 성분, 즉 실버, 크롬, 알루미늄, 텅스텐 등등에 의해 생기는 것 같다. 또한 현의 탠션이 항상 유지되는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 자신의 악기 소리에 대해 문의가 온다면 어떻게 접근하는가.
“현 바꾸세요라고 먼저 이야기한다. 브릿지 보다는 현이 먼저다. 새현으로 교체를 해보고 그래도 부족하다면 다른 브랜드의 현을 시도해보는 것이 그 다음이다. 그리고 브릿지, 사운드 포스트와 함께 원하는 소리를 찾아보는 것이 순서이다.”

 

 

-사운드포스트는 어떤가.
“사운드포스트는 한정된 자리가 있다. 사운드포스트는 가능하면 한정된 위치를 고수한다. 연주자와 함께 사운드포스트의 움직임에 대해 고민하면 하루도 모자란다. 3일, 4일도 모자란다.” 

 

 

-전체적인 한국 제작자들의 실력은 어떤가.
“정말 잘 만든다. 상도 많이들 타고 이태리에서의 수준과 똑같다. 비슷한 시기에 수학한 이태리 친구들도 지금 다들 중견 마에스트로급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만 국내 토양이 이태리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에 힘들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이 있다면.
“이 건물 사고 싶다(웃음). 맨 윗층은 아이들이 살고 공방과 뭐 연습실 이렇게 꾸미고 싶다.’


-건물 사고 싶은 것은 나도 꿈이다(웃음). 인터뷰의 마지막으로 꿈이 뭐냐는 질문에 건물 사고 싶다라고 종결하기엔 좀(웃음)… 현악기 제작자로서의 꿈을 말해달라.
“목표라… 현악기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 제작자들의 모임이나, 바로크 연주자들의 모임 등을 나가보면 모두들 그런 필요를 느끼고 있다. 특히 바로크 연주자들에게 도움을 줄만한 현악기 박물관을 세우고 싶다.”

 


“다른 제작자들의 글과 사진을 보니 맨 마지막에 손 사진이 있는 것을 봤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특별한 이유는 없다. 사진으로 어떤 인물인지, 글로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마지막에 악기를 만든 손이다라는 단순한 사진이다.
“그럼 이번엔 발을 찍자. 난 발이 더 이쁘다(웃음).”

 

 

현악기 제작자 김남현의 발

 

제작자 김남현의 악기 보러가기

 

  • f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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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5/07 12:45
번호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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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멀다고 하면 먼 익산에서 현악기 제작자 이문태를 만났다.   -주변 제작자분들에게 손이 굉장히 빠르다는 소리를 들었다. “잘 만들던 못 만들던 시작을 했으면 줄을 걸어서 들어봐야 한다. 만드는 과정에서 여기가 틀렸고 저기가 못 생겨지고 했다해서 방치하고 그러다보면 계속 만들다만 악기들만 늘어난다. 어떻게 되든 다작을 해보고, 거기에서 실수를 해야 다음부터 그 실수를 넘어갈 수 있거나 실수 이전 과정에서 그 실수를 인지하고 더욱 신경써서 좋은 악기가 나올 수 있다. 하물며 실수가 있다해도 넘어가고 다음 단계로 진행을 꼭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실수과 실력이 쌓이면 그것이 솜씨라고 생각한다.”   -손이 빠르다라는 것에서 제작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는가“나의 경우, 바이올린, 비올라를 기준으로 했을 때 가장 무난한 것이 두 대를 동시에 물려서 진행하는 것이다. 세 대 정도는 무리가 있더라. 천천히 하나씩 몰아가는 스타일도 있지만 내 성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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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진 - 비아체노 공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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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성 - Liutaio [1]

2006. 10  Won bronze medal for cello in 11th Triennale competition of cremona.2006. 11  Won \"Certificate of merit\" for cello tone in 17th international competition of  VSA (Baltimore, Maryland)2007. 5  Was 4th place for cello tone in international competition of cello making in Manchester.2008. 8  Won Gold medal(cello) of 2nd Pisogne italian national violin making competition in progressional division.2009. 8  Won silver medal(cello) of 3rd Pisogne italian 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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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훈 - 정성훈 스트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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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경 -K&J 바이올린 스튜디오 [1]

여성 현악기 제작자가 있다. 한국에 악기를 만드는 제작자가 있냐는 질문을 많이 받고 다녔는데 여성 제작자가 있다. 정재경은 23살의 나이에 현악기 제작을 위해 이태리로 갔다. 20대 시절을 고스란히 그곳에서 악기 제작과 함께 했다. 이하 인터뷰 전문.     -제작자 권석철과 부부라는 것을 밝혀도 되나. “된다. (웃음) 우리는 이태리에서 만나 결혼했다. 어짜피 주소도 같고 공방 이름도 같아서 굳이 안 밝히려고 해도 아실 것이다.   -크레모나에서의 체류기간은. “8년 정도이다. 2000년에 가서 2008년에 돌아왔다.”     -크레모나 이전에는 무엇을 했나. “대학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음악 공부도 재밌었지만 졸업후에 진로가 걱정도 됐었다. 처음에는 대학 졸업후 치료음악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우연히 본 음악잡지에 소개된 현악기 제작가라는 직업이 날 흥분하게 했다. 그래서 돈을 좀 벌고 유학을 가려고 다니던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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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십년 전 권석철은 현악기 제작의 길을 가기위해 이태리 크레모나로 떠났다. 작년에서야 한국으로 들어온 그는 홍성에서 그의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이하 인터뷰 전문.          -한국에 오신지 대략 1년이 되었다. 요즘 들어 현악기 제작학교에서 돌아 오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크레모나의 경우 지금 40 ~ 50명 정도 있다. 그 중에 아주 소수가 외국으로 진출하고 대부분은 한국으로 돌아온다. 앞으로 한국은 제작자들간의 경쟁이 치열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3 ~ 4년 동안 입학생들이 줄고 있다.\"   -한국에서 돌아와서 바로 이곳(홍성)에서 자리를 잡으셨다. 왜 서울 서초동이 아니었나? “서울이 싫었다. 그냥 크레모나 같은 시골이 좋았다. 친지 분의 도움으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조금 적막하다. 악기에 대하 공유할 사람이 적어서 지금은 적응이 되긴 했지만 처음엔 많이 적막했다.” &nb

박경호 -경호park 현악연구소 [1]

현악기 제작자 박경호. 그는 이태리 굽비오 제작학교의 한국인 1호다. 1999년 이태리로 건너가 악기제작을 배운 그는 2003년 한국으로 돌아와 경호 park 현악연구소를 운영, 지금은 고향인 부안에 스스로 집을 짓고 그곳에서 공방을 계속 운영 중에 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   역주: 인터뷰 중간 중간 박경호님의 아드님의 난입(?)으로 녹음기 대화 내용 이외에 알 수 없는 비명소리와 몬스터를 시전하는 소리 등이 들려 인터뷰 전문을 적을 수 없었다. 그나마 아이스크림 2개라는 딜이 성공하여 녹음 내용의 부분이라도 건진 것을 아드님께 감사한다.     -혼자서 집을 지으셨다. 대단하다. \"서울의 공방을 철수하고 이곳(부안)으로 내려와서 처음 한 일이다. 관련 서적을 많이 읽고 흙과 나무로만 집을 만들었다. 쉬고 싶은 마음으로 집을 만들었는데 집 만드는 내내 악기 만드는 생각만 했다. 손이 근질근질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스트링 겔러리 에프홀 소개글입니다. [1]

이 공간은 현악기 제작자의 인터뷰 내용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각 제작자님들을 찾아 뵐 에프홀의 기자이면서 대표로 있는 이정원입니다. 미리 인사 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반갑다. 에프홀이다. 인터뷰 응해줘서 고맙다. “뭐가 반갑나. 자문자답의 형식의 인터뷰다. 반갑다라니, 사람들이 다중인격으로 오해하겠다.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에프홀을 소개하고 싶어서 생각해낸 궁여지책이다. 아마도 이런 형식의 회사소개글은 없을 것이다.”     -에프홀을 간략하게 소개해달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에프홀은 한국의 현악기 제작자들과 그들의 악기를 소개하는 사이트다. 하나씩 하나씩 손으로 만들어나가는 현악기들을 소개하고 그 악기를 만든 사람들의 생각과 철학을 담아 가고 있다. 또한, 일부 악기들을 시연 가능토록 에프홀 사무실에 위탁 전시 중에 있다.”     -에프홀을 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