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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용 - 라무자 아카데미 조회수 14442
작성자 fhole*** 작성일 2010-06-21 18: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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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패질 소리가 끊이지 않는 라무자 아카데미에서 현악기 제작자 장용을 만났다.

 

 

-배우고 있는 학생들이 많다. 취미로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유학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현재 배우고 있는 학생들 중 유학 준비생들이 반 이상이다.”

 

 

-그렇다면, 제작에 대한 스승의 입장도 있지만 유학을 보내는 선배의 입장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겠다. 어떤가? 걱정이 많이 되시겠다. 손재주도 그렇고 성격적인 면도 그렇고, 또한 그곳에 도착해서 생활을 잘 하는 것 까지 신경을 쓰셔야 하니

내가 하는 일은 악기를 잘 만든다 못 만든다 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학생의 성격에 맞게 맞춰가면서 악기를 만들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나도 악기 제작을 시도 해보고 싶었는데, 워낙 성격이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하는 성격이라 그 동안 제작자분들을 만나보고 느낀 것이 내 성격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일이겠다 생각했다.

악기 제작 관련해서 처음 상담을 할 때 절대 그런 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성격적인 면 보다 열의, 열정이 먼저이다. 열의가 있어서 온 사람에게 일부러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바이올린 제작이라는 것은 자기가 여러 방면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들어진 성격적인 면을 제작에 자연스럽게 끼워 맞춰야 한다. , 내면적으로 자신을 컨트롤해서 제작자가 되어야 만들 수 있다.

 

제작을 위한 물리적인 방법, 수치를 알려주고 대패질하는 법을 알려주고 이런 것들은 당연한 것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더 중요한 것은, 신기하게도(웃음)… 당사자에게는 스트레스이겠지만 정신적인 면에 대해서도 간섭을 한다. 그런데 그것은 학생을 계속 가르치다 느낀 것인데 정신적인 면을 건드리지 않으면 수박 겉핥기와 똑같다.

뒤 칠판에 써있는 것을 봐라. ‘비인부전뭐 간단히 말자하면 사람이 안되면 배울 수 없다라는 뜻이다. 사람으로서의 그릇이 되지 않으면 담을 수 없다. 줘도 못 먹는 것이다.”

 

 

-가르쳐보니 열의라든지 손이라든지 부족하다, 다른 길을 찾아봐라 라고 유학을 말린 적이 있는가.

처음 시작할 때 학생들의 열의를 본다. 열의가 없이 오는 경우도 있다. 산업디자인과 출신인 학생이 있었는데 손재주 하나는 기가 막혔다.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너무 기쁜 학생이다. 가르치는 만큼 눈으로 좋은 결과를 만드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손재주만 있지 그릇, 열의가 없었다. 그런 학생은 현악기가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잘 만들 것이다. , 그만두라는 이야기는 안 했지만 스스로 포기하고 나갔다.”

 

 

-제일 나이 어린 학생은 몇 살이었나.

고등학교 2 학년. 그 친구도 처음에 오지 말라고 했었다. 가치관이 아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난 보수 중에서도 보수 진보이다. 굉장히 FM적인 움직임 속에서의 변화를 즐긴다.”

 

 

-20년이 됐다. 90년에 가셔서… 96년에 밀라노도 가셨다.

지금이야 크레모나에서도 제작과 수리 파트가 나눠져 있지만, 물론 크레모나에도 수리 과목도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네글(Negri)이라는 선생님이 계셨던 밀라노의 학교가 수리 파트로 유명했다. 밀라노 시립 박물관, 베네치아 박물관의 현악기 담당이셨다. 삐에몬테 학파이시고, 그 분 댁이 또리노 근처라 과다니니, 로까의 동네였다. 좋은 환경이기 때문에 밀라노에서 수리파트 공부를 위해 공부했다.”

 

 

-크레모나를 졸업하고 나서 또 밀라노의 학교에 들어가신 것이다.

밀라노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크레모나 졸업했다면서 왜 왔냐고 놀리시곤 했다. 가기를 잘 했다. 잘 배우고 왔다.”

 

 

-한국에 들어오시고 몇 대의 악기를 만드셨나.

정확히 기억 못하겠다.”

 

 

-기억을 못 하실 정도면 꽤 많이 만드신 것이다. 에프홀 시작 후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제작자라는 타이틀만 걸고 악기를 안 만드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분들은 국내 토양의 문제라고 말씀들 하시지만 그런 토양 속에서도 만드시는 분들도 있다.

토양이 그렇기 때문에 나 같은 경우는 변칙을 하는 것이다. 현악기 제작 안에서 존재하기 위해 제작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제작 교육은 내 스타일에 맞는 일이다. , 크레모나 후배들도 다 알겠지만 초기의 대부분 후배들이 나의 도움을 받았다. 아무래도 내 스타일이 그렇기 때문인 것 같다.”

 

 

-표현이 웃기지만 연배로 따져보면 크레모나 출신으로서 거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연배시다. 그만큼 부담이 크셨겠다.

크레모나 출신 중에 한국 입국은 제일 처음으로 들어왔다. 솔직히 이태리 크레모나 출신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서초동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알아주겠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실패했다. 들어와서 좀더 한국적인 바탕에 다가갔어야 했는데 너무 유럽스타일을 고집했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브릿지를 얇게 쓴다든지 트리트먼트를 한다든지별 것도 아닌데, 유럽 정통의 수치와 바탕을 고집해서 운영을 했었다. 연주자와 싸우면서 고집을 피웠었다. 또 너무 정통적인 제작과 기법만 고집을 했던 시절이었다. 정통에서 벗어나면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크레모나에서 현악기 제작자에게 가장 큰 욕이 목수라는 표현이다. 목수라는 직업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는 그렇게 표현을 했다. 10, 20년이 지나니 앤틱이라든지 카피라든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악기는 다양하게 있구나 라고 느꼈다. 이제는 시대에 흐름에 맞게 흘러가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제작에 대한 철학을 뭉게 버리기 위한 정신적 싸움을 많이 했다. 정신적인 화합의 결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약력을 보니 음악과를 졸업 하셨다.

졸업이 아니다. 수료를 했다. 기타를 쳤다. 원래는 연주자로서 스페인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다. 그때 당시 음..85년이다. 서울대가 1회로 기타 전공을 뽑았었다. 사실, 어릴 적부터 통기타니 전자기타를 쳤었는데, 클래식기타를 접하곤 클래식의 무궁무진한 넓이에 감동 받아 전공으로 마음을 정했었다. 근데, 서울대의 기타 전공을 한 명 뽑더라. 최종 4명의 엔트리에 들어갔다가 떨어졌다. 떨어진 이후 심사위원이었던 선생님에게 연락을 받고 타 학교에서 기타를 전공했다. 그 선생님의 경우 스페인 마드리드 왕립 기타학교를 졸업하시고 그곳에서 수학할 때 아르바이트처럼 기타 수리며 악기 제작을 하셨었다.”

 

 

-그 선생님을 통해 크레모나나 악기 제작의 길을 가게 된 것인가.

그렇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다. 군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에 선생님에게 인사 차 들려서 악기 제작 쪽에 관심이 있다고 말씀 드리자마자 그래? 그럼 내일 가. 학교 관두고 내일 가.’라고 하셨다. 농담인줄 알았는데 진심으로 바로 떠나시길 바라신 것이었다. 마음을 정하기가 훨씬 편했다.”

 

 

-이전에 인터뷰를 한 김 남현 선생님이 장용 선배님을 만나면 인터뷰 내용으로 적기는 뭐하지만 정말 재미난 이야기가 많다고 했다. 장용 선배님처럼 발이 넓은 사람이 없다고 했다. 심지어 거지부터 게이까지(웃음)…

일부러 그랬다. 학교 만큼은 철저하게 다니고 남는 시간에는 정말 많은 문화와 경험을 했다. 그런 것이 진정한 유학생활이라고 생각했다.”

 

 

-악기 만들기 시작하시면 얼마나 걸리나.

일반적인 기간은 있지만, 뭐 빨리 만들면 한 달에도 가능하지만 6 개월이 걸릴 때도 있다.”

 

 

-최근에 만든 바이올린은 콩쿨에 입선하고 바로 판매가 되었다.

콩쿨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앞에 서서 깃발 들고 먼저 나아가야 후배들과 학생들이 따라 온다. 시간에 맞추다 보니 부족한 점이 많은 악기인데 바로 인연을 찾아갔다.”

 

 

-이태리에서 배우면서 악기, 그리고 제작에 대한 생각과 이제 가르치는 입장에서의 악기, 제작에 대한 생각이 다르지 않을까.

전체적으로 봐서는 수치에 의해서 진행된다. 허나 악기 제작은 목수의 일이 아니다. , 내가 가르치는 것의 목표는 악기 제작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악기 제작자를 키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치에 의해 처음 대패질을 할 때 분명 만족스러운 결과가 안 나온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 대패질과 더불어 이런 저런 방법을 다 동원한다. 사람이 그렇다. 결과를 꺼내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제대로 된 제작자로서의 철학이 있다면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한다면 좋은 대패질이 나올 수 없다.

그런 것이다. 깎을 수 있는 여러 방법 중에 힘들고 숨어 있는 이유를 명심하고 대패질을 계속한다면 좋은 결과 뿐만 아니라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그냥 만드는 것과 현악기 제작과의 차이이다.”

 

 

-그 대답의 연장선에서 다시 묻겠다. 어떤 제작자는 현악기는 이미 수치와 내용이 다 밝혀져 있다. 그래서 난 카빙기 등의 기계를 사용한다. 난 기계에 익숙하다. 꼭 손으로 깎아야 하는 것인가. 손과 기계에 대해서 언쟁하고 싶다면 손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전기 코드 뽑고 해라 라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정신력에 대한 결과물, 그 결과물의 차이는 얼마 안된다. 5%, 10% 정도의 차이 뿐이다. 기계든 손이든 90%는 다 가능하다. 시간의 차이뿐이다. 그러나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은 그 이후이다. 이후 10 20년 뒤의 차이는 엄청나다.

그 이후의 차이에서 기계를 쓰는 사람은 10%의 벽를 절대 넘을 수 없다. 기계로 그것을 뛰어넘는다면 내가 내 손을 갈겠다. 기계로는 90%의 완성을 쉽게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현악기는 그 마지막 10%가 전부이다. 지금 나도 완성된 모습은 아니지만 지금껏 해 온 것들을 바탕으로 난 앞으로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다. 10%, 그것이 전부이다. 90%는 똑같다.”

 

 

-학생들에게는 기계 사용에 대한 것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기계를 쓸 수 있도록 한다.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기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다만, 취미로 하시는 분들에게는 기계 사용에 대한 설명과 과정을 알려준다. 기계를 사용함에서도 분명 장단점이 있다. 취미의 경우 기계에 대한 선택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장인으로서 배움의 길을 가고 있는 학생들과는 끝까지 싸워 기계 및 기타 방법을 모두 못 쓰게 끝까지 싸운다(웃음).”

 

 

-무식한 질문인데, 장용의 현악기의 특징은.

어려운 질문인데기존에 있는 수많은 명기들, 하다 못해 현존하는 제작자들의 악기는 빼고 죽은 제작자들의 악기에 대한 연구도 안 끝났다. 진취적이고 실험적인 접근을 하는 후배들을 보면 가끔 부럽기도 하다. 아직도 내 모델이 없다. 언젠간 내 모델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쉽게 보자면 본인의 초창기 악기와 최근 악기에는 세부적인 발전은 있겠지만 큰 차이는 없겠다.

그렇다. 그것이 악기 제작의 묘미이다. 가끔 악기에 옻칠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난 물어보고 싶다. 오일바니시, 알코올 바니시, 믹스 바니시, 그외의 특수한 바니시 등 그 수 많은 레시피들을 다 연구해보고 옻칠을 하는 건지시도하는 것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허나 내가 보수적인지 몰라도 선행되어야 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에프홀을 시작하고 많은 제작자들을 만나면서 현악기에 대한 의미를 나름 세운 것이 있다. 미학적 기준으로만 보자. 아름다운 얼굴과 못 생긴 얼굴의 차이는 고작 몇 미리 이다. 그 얼굴 안에 갖춰야 할 것들은 다 있다. 구성은 다 되어 있어도 고작 몇 미리의 차이로 인해 우리는 미추를 결정하고 동일한 얼굴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 관찰자의 시각에서는 미추의 구분이 가능하지만 분명 실력 있는 성형외과 전문의라면 그 미묘한 차이를 알 뿐더러 의미 또한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이올린 제작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제작을 배우는 과정이 4년 내지 5년이다. 물론 그 기간이 손에 익혀야 하는 기간이기도 하지만 바이올린의 수치의 차이는 몇 미리 이다. 아칭 만 봐도 겨우 몇 미리 차이다. 그러나 그 1, 2 미리 안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정말 애타는 작업이고 시간이 걸려야 하는 작업이다.

 

현악기 제작에서 연필로 나무에 선을 긋는다 치자. 그 연필선을 3개로 나눈다. 그 얇은 연필선을 아웃라인, 센터, 인라인으로 나눠서 어떤 기준에 맞춰서 나무를 깎느냐 까지 접근한다. 0.1 미리의 싸움이다.

 

 

바니시는 현악기의 소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존과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보존과 아름다움을 위해 바니시가 필요하다. 그러나 원래는 화이트 상태 즉, 백통의 상태가 가장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다. 악기 소리에 최소한의 마이너스 효과를 주기 위해서 천연 바니시를 한다. 바니시를 칠 할 수 없기 때문에 백통을 만들 때 이미 그 마이너스 효과를 생각하고 제작을 해야 한다.”

 

 

이태리어 중에 아마또레(Amatore)라는 말이 있다. 아마추어라는 뜻이다. 내포된 뜻으로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라는 의미도 있다. 아마또레는 그 일을 사랑하는 사람을 말한다. 현악기 제작은 아마또레이어야 한다.”

 

 

-공장제 저가 악기를 제외하고 중국 악기에 대해 논하고 싶다.

지금 중국 악기에 대하 평가를 하라면잘 만들었다. 잘 만들었는데 기계..기계다. 기계로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손이 기계다. 중국은 오히려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기계보다 사람이 만든다. 그러나 기계처럼 만들어진 악기들이다. 의미가 부여된 악기가 아니다. 아마도 하이클래스의 중국의 실력 있는 제작자들이 속이 탈 것이다.”

 

 

-아름다움과 소리,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 현악기다. 소리를 내는 물건이니 소리가 먼저 아닐까.

물론 둘 다 좋아야 한다. 소리가 좋고 아름답지 못한 악기도 좋지 않고 그 반대의 경우는 더 안 좋은 경우다. 크레모나 콩쿨의 경우 제작 200, 소리 200점을 채점한다. 마에스트로들이 제작에 대한 채점을 하고 전문 연주자들이 연주를 통해 소리를 채점한다. 그 과정을 통해 파이널을 결정하고 추려진 악기들에서 100점의 점수를 더 채점해서 총 500점의 점수로 등수를 나눈다. 그런 것을 보면 악기라는 예술적인 물건은 두 가지 포인트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 콩쿨을 준비하는 제작자의 경우 제작에 대한 포인트만 치중하는 경우가 있다.

 

소리가 절반이다. 진정한 제작가란 두 가지를 모두 챙겨야 한다. 한 가지라도 부족하다면 그것은 제작자로서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대부분의 아름다운 악기가 좋은 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작하신 비올라를 보니 생각나는 건데 현재 에프홀에 국내 제작자들의 비올라가 5 대가 있다. 5대가 모두 첨예하게 다르다. 비올라의 형태는 왜 이렇게 다양한 것인가.

크기에 있어서 소리에 예민함이 바이올린 보다 덜 하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신체에 맞게 사이즈가 정해지는 것이다. 정해진 폭 안에서는 확장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태리 출신들이나 독일 출신들은 유학이라는 것, 정통한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으로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국내에서 제작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국내파 제작자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실력이 우선이다. 단지 외부, 비주얼하게 보여주는 것이 포인트라면 콩쿨을 노려야 한다. 단시일 내에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콩쿨이 있다. 그런 콩쿨을 항상 시도해야 한다. 시간의 문제지만 어떻게 발현하느냐의 포인트로는 콩쿨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

개인적으로는 제작자 장용의 완성이다. 공익적인 목표는 중국도 일본도 이미 활성화된 제작학교가 많다. 이전 인터뷰를 보니 김 남현 그 친구가 건물을 사는 것이 꿈이라고 했는데 난 그 건물에 조금 더 체계적인 제작학교를 만들고 싶다(웃음).

 

 

현악기 제작자 장용의 손

 

제작자 장용의 악기 보러가기

  • f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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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6/2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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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tile. agilmente. 연신 하품을 하는 제작자 김남현과의 인터뷰에서 느낀 점이다.     -어제는 밤 세워서 무엇을 하셨나.“아, 뭐, 술 좀 마시고(웃음), 늦게까지 일하고 후배 제작자와 술을 마셨다. 후배의 공방 차리는 것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제작 쪽 일을 한지 오래 되셨다.“처음에 이곳 서초동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목동에 있는 악기사에서 나름의 연마를 했다. 제작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수리 등의 실무를 바로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목동악기사의 현악기 전문 파트의 수리 제작으로 4년 정도 일했다.”     -그때가 언제인가.“1999년… 그 정도. 수학을 하고 한국에 들어온 것이 아마도 1998년이다. 뭐, 나름 이태리에서 돈도 잘 벌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아시는 분이 자꾸 한국에 들어 올 것을 원하셔서 부산에서 같이 일을 했는데, 뭔가 포인트가 잘

정재경 -K&J 바이올린 스튜디오 [1]

여성 현악기 제작자가 있다. 한국에 악기를 만드는 제작자가 있냐는 질문을 많이 받고 다녔는데 여성 제작자가 있다. 정재경은 23살의 나이에 현악기 제작을 위해 이태리로 갔다. 20대 시절을 고스란히 그곳에서 악기 제작과 함께 했다. 이하 인터뷰 전문.     -제작자 권석철과 부부라는 것을 밝혀도 되나. “된다. (웃음) 우리는 이태리에서 만나 결혼했다. 어짜피 주소도 같고 공방 이름도 같아서 굳이 안 밝히려고 해도 아실 것이다.   -크레모나에서의 체류기간은. “8년 정도이다. 2000년에 가서 2008년에 돌아왔다.”     -크레모나 이전에는 무엇을 했나. “대학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음악 공부도 재밌었지만 졸업후에 진로가 걱정도 됐었다. 처음에는 대학 졸업후 치료음악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우연히 본 음악잡지에 소개된 현악기 제작가라는 직업이 날 흥분하게 했다. 그래서 돈을 좀 벌고 유학을 가려고 다니던 대

권석철 -K&J 바이올린 스튜디오 [1]

딱 십년 전 권석철은 현악기 제작의 길을 가기위해 이태리 크레모나로 떠났다. 작년에서야 한국으로 들어온 그는 홍성에서 그의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이하 인터뷰 전문.          -한국에 오신지 대략 1년이 되었다. 요즘 들어 현악기 제작학교에서 돌아 오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크레모나의 경우 지금 40 ~ 50명 정도 있다. 그 중에 아주 소수가 외국으로 진출하고 대부분은 한국으로 돌아온다. 앞으로 한국은 제작자들간의 경쟁이 치열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3 ~ 4년 동안 입학생들이 줄고 있다.\"   -한국에서 돌아와서 바로 이곳(홍성)에서 자리를 잡으셨다. 왜 서울 서초동이 아니었나? “서울이 싫었다. 그냥 크레모나 같은 시골이 좋았다. 친지 분의 도움으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조금 적막하다. 악기에 대하 공유할 사람이 적어서 지금은 적응이 되긴 했지만 처음엔 많이 적막했다.” &nb

박경호 -경호park 현악연구소 [1]

현악기 제작자 박경호. 그는 이태리 굽비오 제작학교의 한국인 1호다. 1999년 이태리로 건너가 악기제작을 배운 그는 2003년 한국으로 돌아와 경호 park 현악연구소를 운영, 지금은 고향인 부안에 스스로 집을 짓고 그곳에서 공방을 계속 운영 중에 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   역주: 인터뷰 중간 중간 박경호님의 아드님의 난입(?)으로 녹음기 대화 내용 이외에 알 수 없는 비명소리와 몬스터를 시전하는 소리 등이 들려 인터뷰 전문을 적을 수 없었다. 그나마 아이스크림 2개라는 딜이 성공하여 녹음 내용의 부분이라도 건진 것을 아드님께 감사한다.     -혼자서 집을 지으셨다. 대단하다. \"서울의 공방을 철수하고 이곳(부안)으로 내려와서 처음 한 일이다. 관련 서적을 많이 읽고 흙과 나무로만 집을 만들었다. 쉬고 싶은 마음으로 집을 만들었는데 집 만드는 내내 악기 만드는 생각만 했다. 손이 근질근질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스트링 겔러리 에프홀 소개글입니다. [1]

이 공간은 현악기 제작자의 인터뷰 내용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각 제작자님들을 찾아 뵐 에프홀의 기자이면서 대표로 있는 이정원입니다. 미리 인사 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반갑다. 에프홀이다. 인터뷰 응해줘서 고맙다. “뭐가 반갑나. 자문자답의 형식의 인터뷰다. 반갑다라니, 사람들이 다중인격으로 오해하겠다.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에프홀을 소개하고 싶어서 생각해낸 궁여지책이다. 아마도 이런 형식의 회사소개글은 없을 것이다.”     -에프홀을 간략하게 소개해달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에프홀은 한국의 현악기 제작자들과 그들의 악기를 소개하는 사이트다. 하나씩 하나씩 손으로 만들어나가는 현악기들을 소개하고 그 악기를 만든 사람들의 생각과 철학을 담아 가고 있다. 또한, 일부 악기들을 시연 가능토록 에프홀 사무실에 위탁 전시 중에 있다.”     -에프홀을 악기